진양 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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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양 하씨는 백제 시대부터 존재한 한국의 성씨로, 고려 시대에는 진주(진양) 지역의 호족 세력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하륜과 하연을 배출하여 종묘배향공신으로 지정되었다. 사직공파와 시랑공파로 나뉘며, 하즙, 하윤원, 하위지, 하륜, 하연 등 여러 인물을 배출했다. 2023년 기준 약 23만 명이 있으며, 경기도에 가장 많이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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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 하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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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성씨 | 진양 하씨 晋陽 河氏 |
이칭 | 진주 하씨(晋州 河氏) |
나라 | 한국 |
관향 | 경상남도 진주시 |
시조 | 하공진(河拱辰) 하진(河珍) |
집성촌 |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남도 남해군 경상남도 창녕군 경상남도 합천군 경상북도 경주시 |
인구 (2015년) | 226,143명 |
홈페이지 | 진양 하씨 대종회 |
인물 |
2. 역사
진양 하씨는 조선 문종 2년(1451년)에 《경태보》가 편찬되었는데, 이는 안동 권씨 성화보보다 25년 앞서고, 세종 2년(1423년)에 편찬된 문화 류씨 영락보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족보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재는 세보 서문만 국립중앙전자도서관에 남아 있다. 이후 1606년에 진양하씨세보를 발행하고, 숙종 46년(1719년)에 기해보를 출간하였다.
진양 하씨는 고려 초기부터 벼슬길에 올라 다방면에서 활동하였고, 진주에서는 충효와 절의로 명성이 높았다. 계유정난 이후 하위지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집안이 큰 화를 입자, 중앙 정계 진출을 지양하고 후진 양성과 학문 탐구에 힘썼다. 문효공 하연 계열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진양 하씨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진양 하씨와 관련한 상당수의 문화재는 진주시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주로 산재해 있고, 국립진주박물관,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에도 기증되어 관람할 수 있다. 과거에는 관향인 경남 지역에 많이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70% 이상이 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하연과 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이었으나, 족보 편찬 당시 서로 계보를 상고할 수 없어 시조를 달리 하였다.
2. 1. 고려 시대
백제시대부터 존속한 성씨라고 한다. 통일신라 말과 고려 개국 당시부터 진주(진양) 지방의 호족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 개국 당시 협력하여 태조 왕건으로부터 토성을 분정받았다. 진양 하씨는 고려 초기부터 재경관인과 재지세력으로 분화되어 활동하였고, 일부 인물들은 고려 말기 학문적 소양을 갖추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 대열에 합류하기도 한다.'''사직공파'''는 고려 말 하즙, 하윤원, 하유종 3대에 걸쳐 봉군 작위를 부여받았다. 또한 하즙, 하윤원, 하자종, 하연에 이르기까지 여말선초 4대에 이르러 재상직을 배출한다. 고려 공양왕의 3녀인 경화궁주와 결혼한 부마 강회계의 외조부가 하즙이다. 하자종의 딸은 율곡 이이의 6대조인 덕수 이씨 춘당공 이양(1367~1447)에게 출가하였다.
'''시랑공파'''는 하공진 순국 후 300년 동안 그 후손들이 고려조에 공신 대우를 받아 4대 현손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제수받게 된다. 고려 충선왕(1308년) 교지에도 그 후손들을 특별한 대우를 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고려조에는 하탁회, 하정재, 하남수, 하소를 비롯하여 하소의 아들인 하호, 하부, 하부심 3형제가 문과급제를 하여 조정으로부터 양친이 전곡을 하사받았다. 이처럼 5대 걸쳐 문과급제자를 배출한다.
- '''사직공파'''(司直公波)
- 시조 '''하진'''(河珍)은 문관 관료로서 고려 정종과 문종조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 9세손 하즙(河楫)은 1324년(충숙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치도감의 정치관으로 활동하였고 사헌부 대관으로 기황후 일족을 처단하였다. 문하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고 진주군(晉州君)에 봉해졌다.[1] 시호는 원정공이다.
- 10세손 하윤원(河允源)은 문과 급제 후 1342년 공민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개경 수복의 공으로 수충좌리공신이 되었다. 우왕 때 대사헌에 이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성리학자이자 관료로서 이색, 정몽주와 교류하였다.
- 11세손 하자종은 문과 급제 후 고려 조정에서 병부상서에 이르고 조선 개국 후 공조참의로 명나라에 세공마를 압령하였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고황후전을 하사받고 귀국하였다. 두문동 72현 중 한명으로 고려조에 충절을 지키고자 하였고 세종 때 공안부윤과 판청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정몽주와 교류하며 학문적인 깊은 우애가 있었고 성리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 12세손 하연(河演)은 고려 말 권문세족 검교시중 이인복의 손자 이존성의 사위이다. 여말선초의 명사인 강회백과 고종사촌이자 동서지간이 된다. 호는 경재, 시호는 문효공이다. 문종의 왕세자 당시 스승이다. 아버지 하자종과 친분이 있는 정몽주의 제자로서 1376년 문과에 급제한다. 동생 하결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이르게 된다.
- '''시랑공파'''(侍郞公波)
-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진주 출신이다. 고려 성종 때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고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으로 왕의 경호를 담당하던 중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게 된다. 현종 때 문관직인 좌사낭중을 역임한다. 거란 2차 침입 때 피난 중인 현종을 자진해서 알현하고 특명을 받아 외교술을 발휘하여 거란 성종을 설득시킨다. 결국 거란군은 개경에서 철군하게 된다. 거란 황제 성종은 하공진의 인품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거란국의 신하로 크게 대우를 하였으나 하공진은 고려국의 신하임을 잊지 않고 여러 차례 탈출을 계획하다 적발된다. 거란 황제로부터 심문을 받던 중 여러 번 회유를 받았지만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순국하였다.[4] 사후 문하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다. 충신을 기억하기 위해 하공진놀이가 민중에 널리 전래되게 된다.
- 10세손 하을지(河乙沚)는 134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363년(공민왕 12) 1등공신이 되었다. 1376년(우왕 2) 계림원수,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다.
- 11세손 하륜(河崙)은 아버지는 순흥부사를 역임한 하윤린, 어머니는 진주 강씨로 1348년 진주에서 출생하였다. 공민왕 14년 1365년 19세 나이로 문과 급제하고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신진사대부들과 가깝게 지냈다.
2. 2. 조선 시대
조선시대에는 종묘배향공신 2명( 하륜, 하연)과 상신 2명, 대제학 1명, 문과 급제자 45명, 무과 급제자 88명을 배출하였다.'''사직공파'''는 고려 말 하즙이 문하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고 진주군(晉州君)에 봉해졌고,[1] 그의 아들 하윤원은 우왕 때 대사헌에 이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하즙, 하윤원, 하자종, 하연에 이르기까지 여말선초 4대에 걸쳐 재상직을 배출하였다. 하위지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 하담과 아들 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얻었다. 하위지는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처형되었다. 사직공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세종·문종 대에 정승을 역임한 종묘배향공신 영의정 하연이다. 하연은 청백리와 승평수문의 재상으로 평가받으며, 후손들에게 정계 진출을 삼가고 학문과 농사에 전념하도록 유언하였다.
'''시랑공파'''는 고려 충선왕 때 교지에 그 후손들을 특별 대우하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고려 조정에서 4대 현손에 이르기까지 공신으로 대우를 받았다. 조선 초에는 하경복, 하한, 하숙보 3대가 고위 무관 관료를 거쳐 중추원의 재상직에 임명되었고, 시호를 추서받았다. 시랑공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선 태종 대에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데 공헌한 종묘배향공신 영의정 하륜이다. 하륜은 이인임의 조카사위이며, 이색의 손녀가 며느리이다.
진양 하씨는 고려 초기부터 벼슬길에 올라 다방면에서 활동하였고, 진주에서는 충효와 절의로 명성이 높았다. 계유정난 이후 하위지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집안이 큰 화를 입자, 중앙 정계 진출을 지양하고 후진 양성과 학문 탐구에 힘썼다. 문효공 하연 계열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진양 하씨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451년(문종 1) 진주 하씨 최초의 족보 《경태보(景泰譜)》 서문에 하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연과 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이었으나, 족보 편찬 당시 서로 계보를 상고할 수 없어 시조를 달리 하였다.
2. 3. 근현대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인 하륜(河崙)과 하연(河演) 2명, 상신 2명, 대제학 1명, 문과 급제자 45명, 무과 급제자 88명을 배출하였다.- '''사직공파'''(司直公波)
- * 하응림은 1559년 정시 문과 급제 후 검열, 봉교 등 사관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공조정랑, 예조정랑을 지내다가 32세에 요절하였다. 송익필과 더불어 조선의 8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중기 학자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 * 하백원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호는 규남, 자승거이다. 자명종을 만들었고 만국전도, 동국지도를 제작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형조좌랑, 석성현감을 역임하였다.
- * 하장수는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대한제국의 사회운동가로 한말 당시 국제 정세에 밝아 청나라와 서구 열강, 일본에 관한 동향 등을 알고 "조선이 하루속히 군관민이 일체화된 '''‘군병체제’'''를 갖추어 앞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각자이다. 이는 당시 개화파 이론가들과 개화사상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었다.
- * 하상기는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남편이다. 인천감리, 중추원의관, 종2품 농상공부 공무국장을 역임하였다.
- * 하재세는 대한제국의 교육자로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국권회복을 역설하고 특히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하였으며, 일명 '천황폐하진양하 사건(天皇陛下晉陽河 事件)'의 당사자로 추정되는 사회운동가이다.
- '''시랑공파'''(侍郞公波)
- * 하수일은 조선 중기 학자로 1591년 문과에 급제한 후 요직인 형조정랑, 이조정랑, 경상도 도사를 지낸 후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남명학을 전수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송정문집을 남겼다.
LG 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어머니는 하근 여사이며 2대 회장 구자경 회장의 배우자이자 구본무 회장의 어머니는 하정임 여사이다. 그리고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의 배우자이자 조석래 회장의 어머니는 하정옥 여사이다. 두 재벌가의 외가집이 진주지역의 대부호로서 진주 하씨 집안이다.
법조계에서는 하경철 헌법재판관, 하창우 대한변협회장, 하종홍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과 하경효, 하태훈, 하명호 고려대 법대 교수 등이 있고, 금융계는 하영구 은행연합회장, 하영기 한국은행 총재, 하춘수 대구은행장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하경근 중앙대학교 총장, 하서현 강원대학교 총장, 하우송 경상국립대학교 총장, 하두봉 서울대학교 부총장, 하용출, 하영선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이 있다. 재계에서는 하현회 LG 유플러스 대표이사, 하석주 롯데건설 대표이사, 하원만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하원기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하언태 현대자동차 대표이사, 하기주 코오롱 대표이사 등이 있고, 정관계 인사로는 하금열 대통령 비서실장, 하동만 특허청장, 하병필 대통령비서실 사회통합비서관, 하대성 경상북도 정무부지사, 하영제 전 산림청장, 하복동 감사원 사무총장, 언론계에서는 하남신 SBS 논설위원, 하종대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이 활약하였다. 군 인사에는 하창호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 하대봉 육군 대총장 등이 있으며, 의학계에서는 하종원 세브란스병원장, 하권익 서울보훈병원장, 하상호 조선대학교 병원장, 하은희 이화여대 의과대학장, 하충식 창원한마음병원 이사장 등이 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하승무 시인(역사신학자)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분파
진양 하씨의 분파는 크게 사직공파(司直公波)와 시랑공파(侍郞公波)로 나뉜다.
- '''사직공파(司直公波)'''
시조 '''하진'''(河珍)은 고려 정종과 문종 때 문관 관료를 지냈으며, 사직(司直)을 역임했다. 9세손 하즙(河楫)은 1324년(충숙왕 11년) 문과에 급제, 정치도감의 정치관으로 활동했고, 사헌부 대관으로 기황후 일족을 처단했다. 문하찬성사(贊成事)로 은퇴 후 진주군(晉州君)에 봉해졌으며[1] 시호는 원정공이다.
10세손 하윤원(河允源)은 문과 급제 후 1342년 공민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수충좌리공신이 되었다. 우왕 때 대사헌에 오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색, 정몽주와 교류한 성리학자이자 관료였다.
11세손 하자종은 문과 급제 후 고려 조정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조선 개국 후 공조참의로 명나라에 세공마를 압송했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고황후전을 하사받고 귀국했다. 두문동 72현으로 고려에 충절을 지키고자 했으며, 세종 때 공안부윤과 판청주목사를 역임했다. 정몽주와 학문적으로 깊은 우애를 나누었고, 성리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12세손 하연(河演)은 고려 말 권문세족 검교시중 이인복의 손자 이존성의 사위이다. 여말선초의 명사인 강회백과 고종사촌이자 동서지간이다. 호는 경재, 시호는 문효공이다. 문종의 왕세자 시절 스승이었다. 하연은 아버지 하자종과 친분이 있던 정몽주의 제자로 1376년 문과에 급제했다. 동생 하결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이르렀다. 하연은 의정부 6조 판서와 대사헌,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황희를 이어 조선 세종(世宗)조에 영의정에 오르고 궤장을 하사 받았다. 세종 재위 당시 비서실장격인 지신사로서 상왕 태종 사이 신중한 처신으로 오해가 불신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 두 임금으로부터 각별한 총애와 대우를 받는다. 당시 문사들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교류를 하였다. 문종 승하 후 단종으로 왕위가 계승 될 시기에 영의정으로서 섭정을 맡아 수양대군 세력으로부터 위협에 맞서 단종에게 왕위계승을 무사히 성사시킨다. 조선 문종 종묘배향공신이다.
하위지는 호는 단계, 시호는 충렬공이다. 외가인 구미시 선산이 고향이며 아버지는 하담은 1402년(태종 2년) 문과 급제 후 제주판관, 경상도 주전별감, 청송군수를 역임한 하담이다. 하위지는 세종 20년 문과에 장원급제 후 집현전에서 세종을 도와 많은 공적이 있다. 여러 주요 관직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충신들과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아들 2명(하호, 하박)과 함께 처형당함. 세조는 하위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그의 인품과 능력을 아껴 심문 중 여러 번 회유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처형된다. 사육신 중 박팽년과 함께 조카 하분, 하포, 하원(귀동에서 개명)을 통하여 유일하게 후손들이 있다. 하성(河成)의 8세손인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의 계대가 1828년(순조 28년)에 발간된 사직공파 《진양하씨세보 무자보》가 발굴되어 사직공파의 계보로 밝혀졌다.[2][3]
하응림은 1559년 정시 문과 급제 후 검열, 봉교 등 사관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공조정랑, 예조정랑을 지내다가 32세에 요절했다. 송익필과 더불어 조선 8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중기 학자들로부터 추앙받았다.
하백원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호는 규남, 자승거이다. 자명종을 만들었고, 만국전도, 동국지도를 제작했다. 학행으로 천거받아 형조좌랑, 석성현감을 역임했다.
하장수는 조선 말기 유학자이자 대한제국 사회운동가로, 한말 당시 국제 정세에 밝아 청나라, 서구 열강, 왜국에 관한 동향을 알고 "조선이 하루속히 군관민이 일체화된 '''‘군병체제’'''를 갖추어 앞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각자였다. 이는 당시 개화파 이론가들과 개화사상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었다.
하상기는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남편이다. 인천감리, 중추원의관, 종2품 농상공부 공무국장을 역임했다.
하재세는 대한제국 교육자로, 일제의 눈을 피해 국권 회복을 역설하고 독립 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천황폐하진양하 사건(天皇陛下晉陽河 事件)'의 당사자로 추정되는 사회운동가이다.
- '''시랑공파(侍郞公波)'''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진주 출신으로, 고려 성종 때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고,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으로 왕의 경호를 담당하던 중 강조의 정변에 가담했다. 현종 때 문관직인 좌사낭중을 역임했다. 거란의 2차 침입 때 피난 중인 현종을 알현하고 특명을 받아 외교술을 발휘, 거란 성종을 설득하여 거란군을 개경에서 철군시켰다. 거란 황제 성종은 하공진의 인품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거란국의 신하로 크게 대우했으나, 하공진은 고려국의 신하임을 잊지 않고 여러 차례 탈출을 꾀하다 적발되었다. 거란 황제로부터 심문을 받던 중 여러 번 회유를 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순국했다.[4] 사후 문하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으며, 충신을 기리기 위한 하공진놀이가 민중에 널리 전래되었다.
10세손 하을지(河乙沚)는 1344년 문과에 장원 급제했고,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363년(공민왕 12) 1등 공신이 되었다. 1376년(우왕 2) 계림원수,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다.
11세손 하륜(河崙)의 아버지는 순흥부사를 역임한 하윤린, 어머니는 진주 강씨로 1348년 진주에서 출생했다. 공민왕 14년 1365년 19세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신진사대부들과 가깝게 지냈다. 조선 개국 초부터 동문수학하던 정도전과 갈등을 빚으며 철저히 견제를 받았다. 친구인 민제를 통해 그의 사위 이방원을 소개받게 된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사공신 1등이 되고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다. 조선 초기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행정 체계를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조선 태종 때 좌의정,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고 70세에 객사했다. 매사에 언행이 신중하고 임금의 심중을 잘 읽었으며,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거나 세력을 만들지 않아 태종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조선 태종 종묘배향공신이다.
하경복은 중시무과 급제 후 함길도병마절제사 등 15년간 북방을 수비하고 군사 교재 계축진설 편찬에 참여했으며, 1435년 의정부찬성, 판중추원사를 역임했다. 세종은 동생 하경리가 형 대신 부모 봉양을 할 수 있도록 고향 인근 지방 수령을 역임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하숙보는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남이, 어유소 등과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웠다. 무관이었으나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 세종의 신임으로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특진관에 임명되고 형조참판, 충청도관찰사, 한성좌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시호는 경절공이다. 양정공 하경복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강장공 지중추원사 하한이다.
하비는 단종 때 선략장군 용양위호군을 역임했다. 군수를 지낸 하지명의 아들이다. 단종의 선위로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이주하여 정착했으며, 호군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조선 중종 때 훈구파 대신으로 기묘사화를 일으킨 영의정 남곤은 하비의 외손자이다. 그리고 남곤의 어머니인 하비의 딸은 연산군 때 권신 임사홍의 외숙모가 된다.
하수일은 조선 중기 학자로, 1591년 문과 급제 후 형조정랑, 이조정랑, 경상도 도사를 지낸 후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남명학을 전수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송정문집을 남겼다.
4. 본관
백제 시대에 타주(陀州)로 불릴 때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으나 세계가 전해지지 않았고, 《고려사》에 나타난 시랑(侍郞) 하공진과 동원(同源)이라 하나 분파 계대(系代)가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고려 정종·문종 양조에 사직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였다.[5]
1451년(문종 1) 진주 하씨(晋州河氏) 최초의 족보 《경태보(景泰譜)》 서문에 하연이 기록하였다. 족보를 편찬할 당시 하연과 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政丞)이었으나 서로 계보(系譜)를 상고할 수 없어 시조를 달리 하였다고 한다.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렬성(居烈城)이다. 663년(문무왕 3)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으며,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에 다시 강주로 환원되었고, 983년(성종 2)에 12목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개편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였으나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도 진주목의 토성(土姓)으로 정(鄭), 하(河), 강(姜), 소(蘇) 4성이 기록되어 있다.[5]
1896년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5. 인구
2023년 6월 15일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자료갱신에 따르면, 진양 하씨는 총 230,481명이다.
조사 연도 | 전체 인구 (명) | 가구 | 남자 (명) | 여자 (명) | |
---|---|---|---|---|---|
style="background-color: #E60012" | | 1985년 | 178,866 | 43,237 | ||
style="background-color: #00479D" | | 2000년 | 192,869 | 60,705 | 98,365 | 94,504 |
2015년 | 226,143 | 113,616 | 112,527 | ||
style="background-color: #00479D" | | 2023년 | 230,481 | 60,705 | 115,304 | 115,177 |
2023년을 기준으로 KOSIS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진양 하씨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은 경기도(42,205명)로 본향인 경상남도(36,591명)보다 많다. 경기도 다음으로는 서울특별시,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순으로 많이 거주하며, 가장 적게 거주하는 곳은 세종특별자치시를 제외한 제주특별자치도이다. 약 21%의 진양 하씨가 경기도에, 19%가 서울에, 약 18%가 경상도에, 약 16%가 부산에 거주한다. 0.4%의 진양 하씨만이 제주특별자치도에 거주하고 있다.[6] 1985년과 비교해 인구는 14,003명, 가구는 17,468가구 증가했다. 진양 하씨 전체 씨족 인구 중 80% 이상이 사직공파 후손 가운데 문효공 하연 선생의 후손이다.[7]
지역 | 전체 인구(명) (2023년) | 가구 (2015년) |
---|---|---|
전국 | 230,481 | 43,237 |
서울특별시 | 37,779 | 8,128 |
부산광역시 | 30,287 | 7,155 |
대구광역시 | 14,381 | 2,866 |
인천광역시 | 10,143 | 1,144 |
경기도 | 42,205 | 3,226 |
강원도 | 3,561 | 761 |
충청북도 | 4,493 | 731 |
충청남도 | 6,079 | 1,566 |
전라북도 | 7,891 | 2,146 |
전라남도 | 6,039 | 2,579 |
경상북도 | 12,929 | 3,150 |
경상남도 | 36,591 | 9,567 |
제주특별자치도 | 1,260 | 218 |
세종특별자치시 | 740 |
6. 집성촌
7. 인물
진양 하씨는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인 하륜(河崙)과 하연(河演) 2명, 상신 2명, 대제학 1명, 문과 급제자 45명, 무과 급제자 88명을 배출하였다.
LG 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어머니는 하근 여사이며, 2대 회장 구자경 회장의 배우자이자 구본무 회장의 어머니는 하정임 여사이다.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의 배우자이자 조석래 회장의 어머니는 하정옥 여사이다. 두 재벌가의 외가 모두 진주 지역의 대부호인 진양 하씨 집안이다.
법조계에서는 하경철 헌법재판관, 하창우 대한변협회장, 하종홍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 하경효, 하태훈, 하명호 고려대 법대 교수 등이 있다. 금융계에는 하영구 은행연합회장, 하영기 한국은행 총재, 하춘수 대구은행장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하경근 중앙대 총장, 하서현 강원대 총장, 하우송 경상국립대 총장, 하두봉 서울대 부총장, 하용출, 하영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이 있다. 재계에서는 하현회 LG 유플러스 대표이사, 하석주 롯데건설 대표이사, 하원만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하원기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하언태 현대자동차 대표이사, 하기주 코오롱 대표이사 등이 있다. 정관계 인사로는 하금열 대통령 비서실장, 하동만 특허청장, 하병필 대통령비서실 사회통합비서관, 하대성 경상북도 정무부지사, 하영제 전 산림청장, 하복동 감사원 사무총장 등이 있다. 언론계에서는 하남신 SBS 논설위원, 하종대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이 활약하였다. 군 인사에는 하창호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 하대봉 육군 대총장 등이 있다. 의학계에서는 하종원 세브란스병원장, 하권익 서울보훈병원장, 하상호 조선대 병원장, 하은희 이화여대 의과대학장, 하충식 창원한마음병원 이사장 등이 있으며, 문화예술계에서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하승무 시인(역사신학자)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8.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참조
[1]
역사기록
고려사』 권112 열전 권제25 제신(諸臣) 하윤원
http://db.history.go[...]
[2]
서적
晉陽河氏 家門人物硏究(2015년)
[3]
웹사이트
무자보 자료링크
http://www.jinjuha.n[...]
[4]
역사기록
『고려사』 권94, 열전7
https://terms.naver.[...]
[5]
역사기록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http://sillok.histor[...]
[6]
웹인용
행정구역(구시군)/성씨·본관별 가구 및 인구
http://kosis.kr/stat[...]
국가통계포털
2014-08-27
[7]
웹인용
행정구역(구시군)/성씨·본관별 가구 및 인구
http://kosis.kr/stat[...]
국가통계포털
2014-08-27
[8]
웹인용
진주하씨(晋州河氏)
http://www.rootsinfo[...]
뿌리를 찾아서
2014-08-27
[9]
웹인용
晋陽 河氏 司直公波 大同 항렬도
http://www.jinjuha.n[...]
晋陽河氏 司直公波
201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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